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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 유훈근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가수 김상희의 인생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아주 평탄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중의 한명이지만, 그렇다고 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그녀 역시 실수를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또한 김상희 남편 유훈근과 김대중과의 인연은 결국 악연으로 끝나고 말았네요.

 

김상희 남편 유훈근 사진

 

가수 김상희(본명 최순강)는 1943년 3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김상희 고향). 올해 72살이죠(김상희 나이).

(김상희 학력 학벌) 풍문여고(풍문 여자 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학과

(김상희 프로필 및 경력) 1961년 '삼오야 밝은 달'를 부르면서 가수로 데뷔하지만, 실질적인 가수 활동은 1965년부터 시작합니다(밑에서 추가 설명).

대표곡으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경상도 청년〉, 〈금산 아가씨〉등이 있습니다.

 

김상희의 별명으로 '학사 1호' 여가수, '최초 여자 MC' 등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벽을 허물었던 최초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상희는 풍문여고 재학 시절 대단한 수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항상 1~2등을 도맡아했고, 노래 등에서도 재능을 보였지만, 결국 집안의 염원대로 고려대 법대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1년 고려대 법학과 2학년 재학중에 KBS 전속 가수가 됩니다.

(당시에는 방송국마다 전속 가수제도가 있었음)

 

김상희 젊은 시절 과거 사진

 

하지만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김상희는 데뷔초에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고려대의 규정때문이었죠.

당시까지 가수와 탤런트 등은 딴따라로 천시하던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대학교 재학생의 경우 연예 활동은 곧바도 퇴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사는 결혼한 생도를, 이화여대는 임신이나 결혼한 학생을 퇴학시켰을 정도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음)

 

결국 김상희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게 되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90년대 중반에야 '얼굴 없는 가수'가 하나의 마케팅 기법으로 활동되었지만, 60년대 초반에는 이런 전략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사실 김상희가 예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도, 자신의 가수 활동을 집과 학교 모두에게 숨겨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개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방송만으로 활동했기에 인기가 없었던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김상희는 가수 활동보다는 MC 활동을 하게 됩니다.

방송국의 정식 MC가 아니라 오리엔탈 호텔 2층에 '엘 파소'라는 음악 살롱에서의 MC 역할이었죠. 지금보면 별볼일 없는 것 같지만, 김상희는 여기서 실력을 갈고 닦아서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습니다.

바로 '최초 여성 MC', '최초 가수 출신 MC'가 되기 위한 기반을 여기서 닦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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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 리즈 시절 사진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데이트'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고 있을 때, 김상희가 타고 가던 버스가 굴러 가벼운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를 학보사 기자가 취재를 하면서 김상희가 고려대 재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죠.

 

 

김상희: "명문대 여대생이 가수활동을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먼저 길을 닦아준 최희준 선배가 고맙다."

 

그렇게 해서 김상희는 본의 아니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얼굴이 공개됩니다.

마침 졸업 연도였기에 고대에서도 큰 제재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서는 여전히 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당시 김상희가 출연하던 방송 프로그램의 담당 PD가 현재의 남편 유훈근이었습니다.

유훈근: "당시 아내 어머니의 가수 반대가 상당했다. 한번은 생방송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방송국에 찾아와 ‘딸을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며 소란을 피웠다."

 

유훈근: "내가 어머니를 막 야단쳤다. 집안일은 다리를 부러트리든 머리를 깎든 집에서 해결할 일이지,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했다."

 

아마 이때는 유훈근도 김상희 어머니가 자신의 장모님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죠.

 

어쨌든 김상희는 집에서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기에' 계속 가수 활동을 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김상희가 가수 활동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죠.

 

 

김상희 남편 유훈근은 1940년 12월 19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납니다(유훈근 고향. 올해 75살이죠.

(유훈근 학력 학벌)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유훈근 프로필 및 경력) KBS PD, MBC 보도부 차장, 신민당 김대중총재 공보비서 등을 거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이후 세종, 태영수산, 한효건설, 명화산업 등의 대표이사직을 두루 거치면서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합니다(김상희 남편 유훈근 직업).

 

특이 사항으로 아버지 유청(김상희 시아버지)이 4선 국회의원 출신의 정계의 실력자입니다. (신민당 출신, 4~6대 전주갑 지역구 국회의원, 8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대한체육회 이사와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1년에는 학교법인 시사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에 취임,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세우기도 합니다.)

즉, 유훈근이 전주 지역의 명문 집안의 아들이었죠.

 

 

어쨌든 김상희와 유훈근은 그렇게 같이 일을 하는데, 유훈근이 김상희의 MC로서의 재능을 알아차립니다.

 

유훈근: "김상희를 보니 나이도 어린데 엄청 간이 컸다. 깡이 좋았다. 배포가 보통 큰게 아니었다. 그래서 MC 한 번 하라고 했다. 아랫배에 힘만 주면 된다고 하고 시켰다."

 

당시로서는 2가지 커다란 터부(여자 MC는 전혀 없었고, 가수 출신 MC도 없었음)였기에, KBS 간부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유훈근: "결국 그 프로그램이 실패하면 사표를 내겠다고 해서, 겨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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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상희 유훈근 부부 사진

 

물론 김상희는 음악살롱에서 다져진 MC 실력이 있었기에,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이후 가수 출신 MC, 여자 MC가 나온 것도 김상희가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김상희는 자신이 인기가 없을 때에도 절망하지 않고, 음악살롱에서 실력을 쌓습니다. 이때의 절차탁마가 이후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 밑천이 되었죠.

 

 

유훈근: "가수도 MC를 할 수 있구나. 잘 하는구나 입증할 수 있고 방송계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다. 그 뒤로 많은 사람이 했다."

 

그렇게 가수와 PD, MC와 PD로 같이 일을 하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집니다. 결국 1968년 약혼식을 하고, 곧바로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김상희 배우자).

(김상희가 전남편과 이혼하고 현남편과는 재혼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무난하게 결혼했던 것이 아니라, 큰 우여곡절을 겪어야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훈근은 4선 의원인 유청의 아들로서 종갓집 7대손 장남이었습니다.

 

유훈근: "종갓집 종손 며느리를 어떻게 딴따라 받나. 절대 안된다고 반대가 심했다."

 

김상희: "조선극장을 경영했던 우리 집안도 한가락하는데, 거기 시집보내서 물 묻히는 거 못 본다고 반대했다. 양측의 반대가 심했는데, 결국 남편이 “어른들 안 오면 우리 둘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양가 식구들 모두 결혼식장에 참가하고, 어쩔 수 없이 서로 며느리, 사위로 인정하게 됩니다.

 

후에 김상희 유훈근 부부는 아들 두명을 낳게 됩니다(김상희 자녀 자식).

 

 

유훈근은 이후 KBS에서 MBC로 이직을 했고, 보도부 차장으로 일하다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4선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역시 무시할 수가 없었죠.

 

결국 유훈근은 10.26에 사면복권된 김대중의 공보비서로 들어갔고, 신민당 국제부장, 정책연구실장, 평민당 전주갑지구당 위원장 및 전라북도당부위원장, 동북아문제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십년만인 1988년 전주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당시 대다수가 유훈근이 공천을 받게 되리라고 예상을 했을 정도로 강력한 후보였고, 게다가 전주갑이 유훈근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유훈근으로써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오원(변호사 출신)에게 뒤집기를 당하고 말죠.

이에 유훈근은 상당히 격앙됩니다.

 

유훈근: "인생의 황금기인 40대를 김대중 전 평민당 총재에게 바치고 배신당했다."

 

 

결국 유훈근은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대부분의 평민당 낙천자들이 '당선즉시 평민당 복귀'라는 캐치플레이를 내건데 반해, 유흔근은 '야권통합의 기수론'을 내걸고 평민당을 배척합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유훈근은 낙선하고 말죠.

 

이후 유훈군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는지 손을 떼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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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상희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상희는 결혼 전에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결혼 후에도 그 인기가 식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줍니다.

 

원래 대부분의 여배우나 여가수들은 결혼후에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여자 탤런트들이 결혼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점차 그 벽이 무너졌지만, 그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었죠.

 

그런데 김상희의 경우는, 그녀의 인기 기반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니라, '팬들과 이야기하는 MC형 가수'라는 특이한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미혼을 무기로 팬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가수 겸 MC로 팬들을 확보했기에, 그녀의 결혼에도 팬들의 대다수가 이탈하지 않았던 것이죠.

 

김상희: "나는 결혼을 하니까 노래부르는 것이 더 쉬워졌다. 결혼을 하면 우선 생활이 안정되고, 또 결혼한 사람 대접을 받으니까 더 좋다."

 

김상희의 고백에서도 이렇게 기혼자의 장점을 한껏 누림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다수가 결혼이 아킬레스건이 되었던 상황에서, 김상희는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네요.

 

 

60, 70년대 활동했던 대다수의 가수들처럼 김상희 역시 금지곡을 2개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금지곡 '단벌신사'는 '단벌신사 우리애인은 서른 한 살 노총각님,단벌옷에 넥타이 두개...'라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들은 북한이 “지금 남조선에는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로 지낸다’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로 인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역선전했고, 결국 한국에서도 금지곡으로 지정하게 됩니다.

 

두번째 금지곡 '어떻게 해'는 더 재미있는 이유였는데,  어떻게 해 부분의 가사가 성행위를 나타내는 "앉아서 해,누워서 해"라는 가사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일반인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자, 결국 방송 금지를 당한 것이죠.

인터넷도 없던 시기에도 이럴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이렇게 바꾸어 불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죠.

 

 

김상희는 남편 유훈근이 김대중과 결별하기 전인 80년대에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습니다. 점점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들어서, 이화여대 옆 반평짜리 공간에서 샌드위치를 팔기도 했죠.

 

이런 어려움을 김상희는 특유의 '대인관계'로 헤쳐나갑니다. 사실 김상희는 한국 가요계에서 대인관계가 좋은 여가수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성격이 원만합니다.

그리고 김상희는 자신의 이런 장점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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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연예인 봉사단체 '한마음회'를 만들어서 27년동안 회장으로 봉사하다가 권성희에게 후임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이사장이 됩니다.(가수 김상희 근황)

 

김상희: "가난한 할머니가 침 하나 맞으려고 땡볕에 두세 시간 기다리는 모습이 짠해서 시작한 봉사활동이었다. 가는 곳마다 할머니들이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권성희·김상배·김병찬·현숙·남궁옥분·인순이·주현미·송대관 등과 함께 매년 6월 1일 서울시 거주 1만명의 노인들을 장충체육관으로 모아서 위로 잔치를 엽니다. 매년 하는 연례행사가 되었죠.

 

그외에도 한국연예인한마음회는 미혼모를 후원하고, 재능 기부 등을 통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좋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김상희가 시작한 한알의 밀알이, 이제는 커다란 숲이 된 것이죠.

 

 

 

김상희는 3박자를 고루 갖추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잣집 남편을 맞이했으며, 자신 역시 돈을 잘 벌어서 큰 재산을 모았죠. 그랬기에 구름 위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인간을 궁휼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 확대되었던 걸까요?

김상희는 자기 생애에 큰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바로 1999년 발생한 병역비리 사건이었죠.

 

(사건 개요) 1995년 김상희는 예비역 대령에게 '아들의 병역면제'를 위하여 제2국민역(5급)판정을 받도록 천만원의 뇌물을 제공합니다(군의관에게 전달).

 

 

(재판 결과) 4년전의 사건이 발각이 되었고, 김상희는 제 3자 뇌물교부죄를 적용,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습니다.

 

 

어쨌든 김상희가 말년에 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평탄한 생활을 해왔고, 또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계기는 음악살롱에서의 MC 활동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방송 활동도 아니고, 게다가 당시에는 여자 MC, 더 나아가 가수 출신 MC가 큰 자리로 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상희는 열심히 노력해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고, 그것이 나중에 크게 활용이 되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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